서양에서 말하는 판타지는 마치 전래동화 같다. 선과 악의 구분은 확실하고 빛과 어둠 또한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. 착한 사람은 이기고 나쁜 사람은 진다. 어둡게 말라붙어 있던 강산은 착한 사람이 이겼을 때 빛으로 새롭게 태어난다. 생명이 뿌리내리고 생수가 흘러넘친다. 그러나 길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만든 판타지는 역시 그의 색깔을 그대로 담고 있다. 그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묘한 B급의 냄새. 그래도 할 말이 없다. 재밌으니까. <블레이드2>에서는 하위문화의 용광로를, <헬보이>에서는 지옥의 악마를 보여주었던 길레르모 델 토로.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그렇듯 어둠과 죽음이 있다. 전래동화 같은 판타지가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아름다운 이야기도 어둠과 죽음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?
작가인 C.S. 루이스가 기독교인이었고 그가 조카들에게 예수의 일생을 쉽게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쓴 동화책 <나니아 연대기>. 덕분에 영화 <나니아 연대기>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가득 담겨있다. 하얀 마녀에 의해 죽게 된 한 아이를 대신해 스스로를 죽음의 길로 내모는 아슬란은 후에 부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. 또한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아슬란이 네 명의 남매들에게 통치권을 위임하는데 이 또한 기독교의 인간론을 나타내고 있다.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영국. 공습을 피해 디고리 교수의 시골 별장으로 간 페번시 가의 네 남매가 나니아에서 겪는 이야기를 통해 <나니아 연대기>는 기독교에서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기독교에서 금기시한 다양한 신화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었다.
예를 들어 <나니아 연대기>에서 옷장을 통해 나아간 곳은 흰 눈으로 덮인 아름다운 장소인데 비해 오필리아가 임무 수행을 위해 찾아가는 장소는 대부분 어둡고 음울하며 무서운 장소다. 단순히 잔인하고 어두운 이미지들이 반기독교적인 요소라는 것은 아니지만 <나니아 연대기>가 보여주었던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와는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 사실이다. 지하세계의 공주, 나무 속의 두꺼비, 식탁을 지키는 요괴 등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천국과는 상반된, 말 그대로 지하세계 지옥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로 가득 찬 영화가 <판의 미로>다.
사랑하는 햄릿에 의해 사랑하던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는 결국 진짜 미치광이가 되어 물에 빠져 죽는다. <판의 미로>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는 지하세계의 공주였다. 지상에서 오필리아로서의 삶은 지하세계의 그것과는 너무나 다르다. 무서운 새아버지와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드는 어머니. 그 가운데 그녀는 새로운 세계로 점점 나아간다. 이렇게 완전히 다를 것 같은 두 오필리아는 묘하게도 닮아있다.
두 오필리아의 마지막 장소도 닮아있다. 미쳐 들판을 헤매던 햄릿의 오필리아는 결국 물에 빠져 죽는다. <판의 미로>의 오필리아가 마지막 새아버지와 맞닥뜨린 장소는 지하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포탈이 있는 곳이다. 물과 포탈. 햄릿에서의 물은 죽음과 맞닿아 있고 <판의 미로>에서의 포탈은 지하세계와 닿아 있다. 그들은 결국 그 통로를 통해 죽음과 지하세계로 나아간다. 포탈 자체가 물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는 사실도 이러한 생각에 힘을 실어 준다. 길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손에 들어가면 무엇이든 재미있는 B급으로 변한다. <판의 미로> 포스터와 광고 문구를 보고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섰다면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다. 그는 어떤 것이든 어둠과 죽음으로 빚어내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. 또한 <판의 미로>에서는 현실과 판타지의 모호한 경계를 표현함으로써 판타지가 현실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이야기한다. 물론 이 역할은 오필리아의 몫이다. 현실의 고통과 고난을 잊게 하는 판타지. 일반적인 판타지가 실제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 데 반해 <판의 미로>는 그러한 현실을 제대로 꼬집고 있다. <판의 미로>는 그렇게 판타지를 비판하는 판타지로 우리를 일깨운다.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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